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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스스로넷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제작한 작품입니다.

[스스로넷 초대석] 20년 간 변함없는 뮤지컬배우 남경주 선생님

2005.10.12 | 조회수 781 키워드 |

스텝

출생 : 1964년
학력 : 서울예술대학 연극영화과
경력 : 롯데월드 예술극장 전속배우,
          서울시립가무단 단원, 서울예술단 단원,
          1994년 SBS 라디오 밤이 흐르는 곳에 진행
수상 : 1997년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
          2004년 제10회 한국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데뷔 : 1982년 연극' 보이체크'
작품 : 드라마 'SBS 신비의 거울속으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갬블러'

내용


지금의 남경주로 크기까지는 그의 형 남경읍의 도움이 무척 컸다.
시작부터가 아니라 그 시작이 준비되는 밑바탕이 되어준게 남경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6살 터울의 형이 대학에서 뮤지컬을 공부할 당시 중학생이었던 남경주는 형덕분에 가요나 팝보다 뮤지컬 음악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고 아주 자연스럽게 뮤지컬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이런 것들의 영향이었을까. 고등학교 내내 공부한 조소를 고3 1학기가 다 끝난 시점에 그만두고 형을 따라 서울예전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뮤지컬 배우가 된 것이 어린 시절부터 받은 형의 영향이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분출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서울예전을 졸업하고 당시 거의 유일한 뮤지컬 전문단체였던 시립가무단에 들어갔다.
남경읍씨 역시 그곳에 있었고, 당시의 남경주에겐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어 시립가무단에 있었던 때를 너무도 행복했던 때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남경주에게도 슬럼프는 여러번 있었다.
처음 시립가무단에 들어갔다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때문에 실망하고 시립가무단을 그만두었던 때가 바로 그 첫번째였다.

당시의 열악한 뮤지컬계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꿈을 찾아 도전했던 남경주의 이런 실망감은 당연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도 항상 남경주를 아껴주고 힘을 주었던 그의 부모님과 형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남경주는 얼마전 1년여의 미국 뮤지컬 연수를 갔다 왔다.
스타라는 이름으로 인정된 실력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갈고 닦으려는 작업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뮤지컬계의 배우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않좋다고 투덜대는 후배들에게 따끔하게 말한다.
자신에게 더 엄격해지고 실력을 쌓으면 대우는 좋아진다고.

얼마전 남경주는 "남자넌센스" 에서 배우 겸 연출을 같이 했다.
당시 뮤지컬을 제안했던 단체에서 연출도 같이 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제안을 받아들여서 했던 것이지만 해보면 배울 것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했다.
그는 이 작업에서 자신이 배우로 작품을 하면서 느꼈던 귄위주의적이고 비효율적인 연습과정이나 분위기를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런 자유스러운 분위기의 작업들은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크게 호평을 받았다.

남경주는 뮤지컬을 제작하는 사람들과 연출가, 스텝, 그리고 배우들이 모두 빨리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자기안에 갇혀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만을 가지고 놓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걸 빨리 열어서 다른 생각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것이 중요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너무 그것만 고집하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남경주는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자신이 모아둔 돈을 다 가지고 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각종 공연과 갤러리, 콘서트등을 보면서 다 써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돈 한 푼 없이 돌아왔지만 가슴속에는 수십년을 버틸만한 그 무언가를 가득 담아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도 꾸준히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우리는 그가 가진 여러 색깔 중에서 한두가지 색만 찾아냈을 뿐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위해 질주하는 그가 다음에 우리에게 보여줄 색깔은 또 어떤 것일지 기대된다.
제작노트
지금의 남경주로 크기까지는 그의 형 남경읍의 도움이 무척 컸다.
시작부터가 아니라 그 시작이 준비되는 밑바탕이 되어준게 남경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6살 터울의 형이 대학에서 뮤지컬을 공부할 당시 중학생이었던 남경주는 형덕분에 가요나 팝보다 뮤지컬 음악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고 아주 자연스럽게 뮤지컬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이런 것들의 영향이었을까. 고등학교 내내 공부한 조소를 고3 1학기가 다 끝난 시점에 그만두고 형을 따라 서울예전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뮤지컬 배우가 된 것이 어린 시절부터 받은 형의 영향이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분출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서울예전을 졸업하고 당시 거의 유일한 뮤지컬 전문단체였던 시립가무단에 들어갔다.
남경읍씨 역시 그곳에 있었고, 당시의 남경주에겐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어 시립가무단에 있었던 때를 너무도 행복했던 때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남경주에게도 슬럼프는 여러번 있었다.
처음 시립가무단에 들어갔다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때문에 실망하고 시립가무단을 그만두었던 때가 바로 그 첫번째였다.

당시의 열악한 뮤지컬계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꿈을 찾아 도전했던 남경주의 이런 실망감은 당연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도 항상 남경주를 아껴주고 힘을 주었던 그의 부모님과 형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남경주는 얼마전 1년여의 미국 뮤지컬 연수를 갔다 왔다.
스타라는 이름으로 인정된 실력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갈고 닦으려는 작업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뮤지컬계의 배우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않좋다고 투덜대는 후배들에게 따끔하게 말한다.
자신에게 더 엄격해지고 실력을 쌓으면 대우는 좋아진다고.

얼마전 남경주는 "남자넌센스" 에서 배우 겸 연출을 같이 했다.
당시 뮤지컬을 제안했던 단체에서 연출도 같이 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제안을 받아들여서 했던 것이지만 해보면 배울 것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했다.
그는 이 작업에서 자신이 배우로 작품을 하면서 느꼈던 귄위주의적이고 비효율적인 연습과정이나 분위기를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런 자유스러운 분위기의 작업들은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크게 호평을 받았다.

남경주는 뮤지컬을 제작하는 사람들과 연출가, 스텝, 그리고 배우들이 모두 빨리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자기안에 갇혀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만을 가지고 놓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걸 빨리 열어서 다른 생각들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것이 중요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너무 그것만 고집하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남경주는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자신이 모아둔 돈을 다 가지고 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각종 공연과 갤러리, 콘서트등을 보면서 다 써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돈 한 푼 없이 돌아왔지만 가슴속에는 수십년을 버틸만한 그 무언가를 가득 담아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도 꾸준히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우리는 그가 가진 여러 색깔 중에서 한두가지 색만 찾아냈을 뿐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위해 질주하는 그가 다음에 우리에게 보여줄 색깔은 또 어떤 것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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